인도.네팔 여행기(8)
오늘은 1월 27일. 아직도 안개가 자욱하다. 오늘도 역시 콜이 울리기 전에 잠이 깬다. 이 호텔은 자그마하면서도 제법 시설은 좋다. 따뜻한 물이 계속 나온다. 샤워를 하니 기분이 상쾌하다. 5시 30분 콜이다. 준비를 마치고 식당으로 내려가니 모두 생생한데 이 여행을 준비하느라 고생했던 동료가 골골한다. 졸업은 같이 했지만 입학이 빠른 선배가 홀로 오게 되기도 했지만 편도선염을 앓고 있는 바람에 동무 겸 간병해 주느라고 함께 지내다가 탈이 난 것이다. 신경이 예민한 이 친구가 선배의 코고는 소리와 음식으로 인한 설사 증세로 밤새 잠을 설치는 모습에 지쳐버린 것이었다. 우리가 교대를 하자고 하였지만 체면에 자기가 한다고 우긴다. 우기는데 장사가 어디 있누 하면서 ... 그대로 하기로 한다.
아침 식사 후 숙소에 들러 대충 정리하고 나오니 모두 집합이다. 참 시간 잘 지킨다. 아직은 모두 괜찮은 모양이다.
7시 30분 호텔을 뒤로 하고 부처님께서 열반하신 쿠시나가르로 향한다. 버스에 오르니 새로운 얼굴이 보인다. 인도에서 10년을 살고 있는 한국 교민이다. 와우인디아 직원으로 근무한단다. 그래서 이렇게 우리들의 가이드를 할 수 있단다. 인솔자의 말을 빌리면 인도 가이드 중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가이드라고 한다. 한양대 체육과 출신의 김은희라는 여성이다. 학창 시절에는 수영 선수였고, 역마살이 끼어서 여행을 좋아하다 보니 가이드가 되었다고 한다. 앞으로도 인도에서 살 예정이라고 한다. 말이 통하니 안심이 된다는 동료들의 말. 우리 가이드를 하던 친구는 어느 팀으로 갔는가 했더니 룸비니 공항에서 만난 팀으로 옮겼단다. 그 팀의 사정이 눈에 보이는 듯하다. 우리와 달리 패키지로 온 팀이다. 그래서 많은 불이익을 감수해야 하는 것이다.
하여튼 설명하는데 시원시원하다. 숨통이 확 트이는 것 같다.
20여 분 후 열반 성지인 쿠시나가르 성지인 쿠시나라 입구에 도착한다.
<새로운 가이드 김은희씨의 설명을 듣고 있는 동료들>
<소원을 빌면서 탑 주변에 금종이를 붙여 놓았다.>
<탑돌이를 열심히 하는 동료들>
<옛날 많은 수행자들이 도를 닦았던 자리라고 한다.>
역시 입구에서 카메라 1불, 비디오 3불의 촬영료를 받는다. 안개가 너무 많이 끼어 앞이 제대로 보이지 않는다. 이곳은 A.D.400~600년에 발견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45년 간 가르침의 여행을 계속하여 80세에 달한 부처님께서 열반에 드시던 그 해의 우기에 병이 들어 열반에 가까운 것을 깨닫고는 제자 아난존자 만을 데리고 마지막 여행을 떠났다. 그리고 그 당시 풍요로웠던 바이샬리를 지나 파바마을에서 대장장이의 아들 춘다가 공양한 식사로 이질 증상을 얻었다고 한다. 병의 깊음을 헤아리신 부처님은 당시 마라족의 도읍인 쿠시나가르로 발길을 옮기시다가(고향인 가비라성이 목표였다고 추측됨) 쿠시나가르 교외에서 제자 아난다가 지켜보는 가운데 두 그루의 커다란 사라나무 사이에서 80세로 입적하였다고 한다.
비통해하는 제자들에게 “부처님의 입적 후에도 부처님을 의지하고 또 법(진리의 가르침)을 의지하도록” 당부하시고 가르침에 의문이 있으면 물으라고 재촉하신 후 “모든 사물과 현상은 지나가는 것, 매사에 게을리 말고 수행을 완성하라.”고 이르신 후 열반에 들었다고 한다. 이 때 사라나무는 때 아닌 꽃을 피우고 그 꽃잎들이 흩날려 부처님의 몸을 장식했다는 의의 깊은 불교 성지이다.
사진에 보이는 곳이 라바마르 흙무덤(높이 42미터의 흙벽돌탑)으로 부처님의 유해가 다비(화장)된 터로 유명하다.
가운데에 있는 부처님 열반 정사로 들어간다.
<열반에 드셨다는 곳에 지은 정사>
<부처님께서 열반에 드실 때의 모습을 재현해 놓았다.>
들어가니 부처님께서 열반하실 때의 모습을 그대로 재현해 놓았다. 옆으로 비스듬히 누운 자세로 열반하셨다고 한다. 모드 금으로 도금을 하고 있었다. 우리는 들어가면서 신을 벗고 예불을 드리고 나왔다. 그런데 신들이 가지런히 놓여 있는 것이 아닌가. 알고 보니 인도인들이 신들을 정리해 놓고는 자기들이 정리했으니 돈을 달라는 것이었다. 못들은 체하고는 둥근 흙무덤을 시계추 방향으로 열을 지어 돈다. 역시 인도에 왔구나 생각이 들 정도로 끈질기게 돈을 달라고 따라다닌다.
계속 도는데 입구를 찾을 수가 없다 한 동료가 소리친다. “마음이 깨끗한 사람에게만 입구가 보인데.”라고 ... 실상은 안개가 너무 많이 끼었기 때문이다. 다시 한 바퀴를 더 돌면서 유심히 살피니 입구가 보인다.
얼른 나와 인도인들을 피해 버스에 오르는데 여자 동료들이 화장을 하러 간단다. 가이드와 인솔자가 안내하여 다시 들어가 볼 일들을 보고 나온다. 기다리는 동안 인도인들은 버스 옆에서 계속 안내 책자를 사달라고 하거나 1불을 달라고 외친다. 참 질기다. 그렇게 무시하는데도 전혀 개의치 않는다. 그 중 한 인도인은 가이드에게 한화 26,000원을 보이며 달러로 바꿔 달라고 보챈다. 이 친구는 약아서 한화로 구걸을 하여 돈이 모이면 한국 관광객들에게 달러로 교환하는 방법으로 돈을 벌고 있었던 것이다. 옆에서 구걸하던 친구가 부러운 듯 쳐다본다. 그만큼 한국 관광객들이 많이 찾는다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을 것 같다.
30여 분 동안 관람과 볼 일을 마치고 버스에 오르니 8시 50분이다. 이제 바라나시로 향한단다. 여기서 120킬로미터 정도 떨어진 곳인데 6시간 정도 걸린다고 한다. 이렇게 오랜 시간을 가야 하는 이유는 주마다 경계가 있는데 이곳을 지날 때마다 통행세를 내야 한단다. 그것만 있으면 좋은데 중간중간에 조폭들이 운영하는 경계선이 있는데 이곳을 통과할 때마다 통행세를 내야 한단다. 정부에서도 전혀 손을 쓰지 않으니 성행하는 것이라 한다. 조폭들의 세상인 듯한 느낌이 든다. 이것도 인도이니까 가능하다는 데는 할 말이 없다.
이제 설법의 땅인 녹야원으로 향한다. 우리는 가는 도중에 갠지스강의 한 다리를 건너는데 엄청 막힌다. 그 와중에 다리 아래를 살피니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는 광경을 목격하게 되었다. 무엇을 하는 것인가를 가이드에게 물으니 시체를 화장하는 장면이라고 한다.
<다리 마래에서 화장을 준비하는 모습이 보인다. 왼쪽에는 빨래터가 있다.>
갠지스강 전체가 화장장이라는 것이다. 우리처럼 별도의 화장장이 있는 것이 아니란다. 시체를 처리하는 방법은 나무를 이용하는 방법, 전기로 하는 방법, 그대로 강에 버리는 방법의 세 가지로 행해진다고 한다. 나무로 화장하는 경우는 300~600달러의 나무 비용이 든다고 한다. 잘 사는 사람들은 나무를 풍족하게 장만하여 완전히 태울 수 있지만 나무를 적게 써서 제대로 태워지지 않았을 때는 대충 정리하여 갠지스강에 버려진다고 한다. 전기를 사용하는 경우는 나무를 살 수 없는 사람들이 이용하는 방법으로 거의 태워지지 않고 검게 그을릴 정도로 하여 갠지스강에 수장된다고 한다. 또 그대로 화장하지 않고 갠지스강에 수장되는 경우는 첫째, 어린아이가 죽었을 때, 병으로 죽은 사람, 사고로 죽은 사람 등은 시신을 그대로 수장한다고 한다. 그 까닭은 태어날 때 이미 죄를 짓고 태어났기 때문에 사고, 병 등으로 죽은 경우는 죄를 용서받은 것으로 생각하여 그렇게 한다는 것이다. 그것뿐만 아니라 동물들의 죽은 시체도 그대로 버려진다는 것이다. 그런 것을 알고 있는 인도인들이 그 물에 목욕을 하고 양치를 하고 음료수로 사용한다는 것이다. 우리 상식으로는 이해가 되지 않지만 인도이기 때문에 행해질 수 있다고 생각하면 편할 것이다.
안개가 심하게 끼어 정확하게 보이지는 않았지만 하여튼 인도이다. 버스가 다시 조금씩 움직인다. 막힌 이유를 알고 보니 경운기가 고장이 나니까 짐은 그대로 둔 채 경운기만 옮겨 고치러 갔기 때문이란다. 경운기를 고쳐서 다시 짐을 가져갈 때까지 막힘이 계속된다는 것이다. 이 글을 읽는 분들 어떻게 생각하실지 궁금하다. 인도인들은 이런 일들이 평상시에 다반사로 일어나는 일이어서 전혀 개의치 않는다고 한다.
얼마나 흘렀을까. 배가 고파온다. 13시쯤 되어 어느 한적한 식당에 들른다.
<식당의 겉모습>
<식당 같지 않은 식당이다. 강의실 분위기가 난다.>
오늘도 우리가 준비한 음식으로 때워야 한단다. 역시 정부가 운영하는 식당으로 대부분 자리만 빌려 주고 음식은 여행객들 스스로 해결하게 하는 식당이란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식당은 큰데 주차 시설이 아주 비좁다는 것이다. 버스 두 대만 서면 주차장이 꽉 찬다. 대신 정원은 엄청나게 넓었다. 아직 차 문화가 발달하지 않아서 그런가보다.
가져간 라면 등과 고추장, 깻잎, 통조림 등을 꺼내 놓으니 푸짐하다. 인도 여행을 하려고 할 때에는 먹을 만한 음식점이 없어서 자체로 해결해야 하는 곳이 있다는 것을 염두에 두고 준비해야 할 것이다.
식사를 마치니 14시다. 녹야원까지 반 정도 온 것 같다. 3시간 정도만 더 가면 사르나트(녹야원)이다.
이제 차츰 힘들어지는지 차만 타면 모두 잠에 빠진다. 가이드도 설명을 하다가 모두 잠이 드니 마이크를 접는다. 날은 점점 더워진다. 차츰 겉옷을 벗고 다닐 정도로 더워진다. 이제 혹서기가 가까워지는 듯하다.
인도는 계절을 3등분한다. 건기(10~2월), 혹서기(3~6월), 우기(7~9월)의 세 계절로 구분한다. 대부분의 공사가 건기에 이루어지기 때문에 곳곳마다 공사 중이다. 그런데 공사를 하는 중간에 혹서기가 오면 거의 일을 할 수 없을 정도로 날이 더워지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또한, 공사를 마무리하기 전에 우기가 닥치는 경우가 많아서 그 동안 했던 공사들이 헛일로 끝나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가이드의 설명이 끝나갈 무렵 녹야원에 도착한 모양이다. 버스가 녹야원 앞에 선다. 지루한 버스 안에서 다시 해방되는 것이다. 17시를 조금 넘었다. 입장한 후 먼저 박물관에 들러 녹야원에 대한 상식을 먼저 얻고 관람을 한단다.
<박물관 입구. 입구에 들어서면 곧바로 사자상이 보인다.>
그러나 박물관은 촬영 금지 구역이다. 한 장의 사진도 찍지 못하고 입구만 찍는다. 박물관을 나와 녹야원을 관람하기 시작한다.
사르나트(Sarnath. 녹야원)에 대해 알아보면,
부처님께서 정각을 이루신 후 7주간 명상에 잠기셨을 때, 하늘에서 재석천이 내려와 부처님께 크나큰 깨달음을 중생을 위하여 설법하여 줄 것을 간청하였다. 이 때 부처님께서는 사르나트에서 수행 중인 교진여 등 5명의 수행자들을 첫 설법의 대상으로 정하고 부다가야로부터 230킬로미터 떨어진 걸어서 이곳 녹야원으로 오셨다고 한다. 그리고 부처님께서 5제자를 상대로 첫 설법을 실현한 이후로 이곳은 4성지의 하나가 되었다고 한다. 후에 아쇼카 대왕이 이러한 초전법륜지로서의 의미를 기리기 위해 다메크 스투파를 건립하였는데 지금도 녹야원에 건재하고 있다고 한다.
<다메크 탑>
그 외로 부처님의 전생담(자타카)과도 관계가 깊은 사슴 동산, 사르나트 고고학 박물관도 방문의 의미를 깊게 하는 곳이다. 특히, 박물관은 B.C. 3세기에서 12세기 간의 작품들이 소장되어 있으며, 그 입구에 있는 아쇼카 석주의 머릿돌인 4사자 석주상과 초전법륜상은 박물관의 백미로 평가받고 있다고 한다.(금요일은 휴관) 아쉬운 것은 촬영금지로 사진으로 보여 줄 수 없다는 점이다.
그런데 정사의 일부에 철조망을 쳐 놓았는데 그 속에 공작새와 사슴들이 뛰놀고 있다. 사원과 사슴 동산이 공존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사원에 사슴 동산이 공존한다는 것이 재미있다. 세계 어느 나라에도 없는 경우이기 때문이다.
<철조망 너머에서 거닐고 있는 사슴들>
<공작도 같이 거닐고 있다.>
그에 대한 전설을 살펴보면,
본래 이곳은 사슴들이 살고 있었던 동산이라고 한다. 그런데 녹야원이 생긴 이후로 사슴들의 수가 계속 늘어나자 아쇼카 왕은 그 수를 줄이려고 매일 한 마리의 사슴들을 제물로 바치게 하였다고 한다. 어느 날 아쇼카 왕은 한 사슴의 청원을 받게 되었다고 한다. 그 사연인 즉 제물로 바쳐지는 날에 해당하는 사슴이 보낸 청원이었던 것이다. 이 사슴은 당시 임신을 하고 있었다고 한다. 이 사슴은 왕 앞에 나아가 아뢰기를 나 한 목숨이 제물로 바쳐지는 것은 상관없지만 뱃속의 아이는 제가 제물로 바쳐짐으로 해서 태어나기도 전에 제물이 됨을 안타까이 여겨 청원한다는 것이었다. 단 아기가 태어나면 그 즉시 제물로 바쳐지겠다고 하자 아쇼카 왕은 그에 감복을 받아 청원을 받아들여 그 이후로는 사슴을 제물로 바치게 하는 것을 금지하고 사슴 동산을 녹야원에 함께 둘 것을 명하였다고 한다.
<탑 뒤쪽에 마련된 제터에서 제를 올리는 동료들>
<우리의 여해을 무사히 마칠 수 있도록 기원하는 동료들>
이런 녹야원을 둘러보고 있는 동안 해가 서산에 기울고 있다. 우리는 다시 웅장한 다메크 탑을 구경하면서 탑돌이를 하였다. 이 탑을 3번 돌면 원하는 소원이 이루어진다는 말에 팀원들은 열심히 돌았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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