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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콩글리쉬 vs 코리안 잉글리쉬
하얀제비
2006. 8. 22. 11:31
콩글리쉬 vs 코리안 잉글리쉬
원어민이 비원어민을 이해하려고 노력해야
우리나라에서 영어를 공부하는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콩글리쉬란 말을 들어보았을 것이다.
“‘핸드폰’은 콩글리쉬야, ‘cell phone’이나 ‘mobile phone’이라고 해야 정확한 영어야.”
“저 사람은 발음이 완전히 콩글리쉬다.”
모두가 아는 바와 같이 '콩글리쉬'는 Korean English를 줄여서 만든 용어인데 일반적으로 한국 사람들이 사용하는 ‘잘못된, 틀린 영어’라는 부정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다. 그래서 콩글리쉬를 써선 안 된다고 주장하면서 콩글리쉬를 고쳐주겠다는 제목의 책이나 교육 프로그램도 많이 등장 했었다. 지금도 영어를 익히려고 노력하는 우리나라 사람이 가장 듣기 싫은 말은 아마 “그 사람 영어는 콩글리쉬다.”일 것이다. 누구나 싫어하는 콩글리쉬, 그러면 콩글리쉬는 과연 무엇일까?
사람들이 흔히 콩글리쉬라고 판단하는 기준을 보면 첫째로 한국 사람들이 만들어서 사용하지만 원어민들은 사용하지 않는 표현들이 있다. 앞에서 언급한 ‘핸드폰’, ‘아이쇼핑’, ‘백미러’ 등이 그러한 예이다. ‘핸드폰’은 ‘cell phone’이라고 해야 하고, ‘아이쇼핑(eye shopping)’은 ‘window shopping’이라고 해야 하고, ‘백미러(back mirror)’는 ‘rear view mirror’라고 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말이 정말 잘못된 표현이라서 원어민은 이해를 못할까? 가깝게 지내는 미국인 친구에게 물어보았더니 모두 정확하게 이해한다고 했다. 그래서 처음에 이 말을 들었을 때는 어땠냐고 다시 물어 보았다. 대답은 이해하는 데 문제가 없었다는 것이다. 이 말을 이해할 수 있는 문맥이 주어져서 쉽게 알아차렸겠지만 그의 대답은 “English is English.”였다.
우리가 가진 귀중한 유산 중에는 기존의 영어로는 표현 할 수 없는 것들이 많이 있다. 우리나라 고유의 아름다운 시, 문학, 음식, 예술 등을 세계에 알리기 위해서는 우리가 Korean English를 개발하여 사용할 수밖에 없다. 이젠 어떻게 미국 사람과 똑같은 영어를 사용할 수 있을까 보다 영어로 어떻게 우리의 것을 잘 전달할 것인지에 좀더 고민을 할 때가 아닌가 생각한다.
미국 라이더 대학의 오세웅 교수는 다음과 같이 지적한 바 있다. “미국식, 영국식 영어를 따라가려고 모방에만 힘쓰지 말고 영어를 우리 것으로 만들어 새로운 이야기를 하고, 새로운 영어를 창조하여 우리 것으로 하는 것이 한국에서 영어 좀 한다는 사람들의 의무일 것이다.” 우리식 영어는 고사하고, 영어식 어투가 우리의 말에까지 침투하는 것을 볼 때 정말 중요한 지적이 아닐 수 없다.
오 교수는 헤어지는 인사말로 “Days of Calm for you!(조용한 나날 보내시길 바랍니다)”라는 새로운 표현을 시도한다고 했다. 한국식의 새로운 영어 인사말을 만들어 본 것이다. 이는 영어를 창조적으로 수용한 결과이다. ‘Korean-English’가 만들어진 순간이다. 그러나 여전히 콩글리쉬라는 말 자체에 담겨 있는 부정적인 인상을 감출 수 없다. 과연 ‘Korean-English’는 단지 콩글리쉬일 뿐일까.
모 방송에서 영어를 희화화 하면서 많은 인기를 누린 적이 있다. “그때그때 달라요.”라는 유행어는 삽시간에 전국으로 퍼져나갔다. 지금도 한 개그프로그램에서는 영어 발음을 가지고 사람들을 즐겁게 해주고 있다. 이와 같은 현상들을 보면서 거꾸로 우리나라 사람들이 영어로부터 얼마나 많은 스트레스를 받아왔는지 생각해봤다. 영어와 관련한 개그가 유행 하는 건 그만큼 한국 사람들이 영어에 대해서 각자 한마디씩 하고 싶을 만큼 고민을 해왔다는 얘기가 된다. 이제는 영어에 대한 과도한 집착에서 벗어나 ‘Korean-English’를 고민해 볼 때이다. 창조적인 영어 수용이 필요한 시점이라는 뜻이다.
영어를 창조적으로 수용하자
두 번째 문법적으로 틀린 표현을 쓰는 경우 콩글리쉬라고 간주한다. 어순에 있어서 한국어의 어순으로 ‘나는 밖으로 나갔다.’를 ‘I went outside.’라고 하지 않고 ‘I outside went.’와 같이 사용하는 경우이다. 이런 것은 영어를 처음 배울 때 할 수 있는 실수로 어느 정도 기간이 지나면 고쳐지게 마련이다. 그런데 큰 문제가 없는 영어 문장임에도 문법 규칙을 지나치게 따져서 잘못된 표현이라고 생각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아래의 문제를 보자. 한 남자가 열심히 노력해서 돈을 벌어 자신의 집을 지었다. 이런 경우 영어로 어떻게 표현하면 좋을까?
(1) He built his house. (2) He had his house built.
정확하게 말하면 두 번째 문장이 맞지만(그가 자기 손으로 직접 집을 지은 것은 아니므로) 원어민들은 첫 번째 문장도 별문제가 없다고 생각한다고 한다. 사람들이 대화를 할 때, 단어와 문장만을 사용해서 의사소통을 하는 것이 아니라 배경지식과 문맥도 활용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우리말을 사용 할 때도 저 정도의 유연성은 있지 않은가? 언어를 사용하는 데 있어 기본적인 규칙은 지켜야 하겠지만 지나치게 법칙에 연연하다 보면 언어의 본래 기능인 의사소통의 효율이 떨어질 수 있다. 영어도 우리말과 같은 언어에 불과하다는 것을 기억하고 조금은 관대해지자.
언어라는 것은 매 순간 바뀌게 마련이다. 지금 이 글을 쓰는 순간에도 언어 사용자들은 새로운 생각을 하고, 색다른 표현을 사용한다. 영어도 언어의 한 종류인 이상, 이러한 법칙에서 벗어날 수 없다. 많은 사람들에게 지금 통용되고 있는 ‘Apple’대신에 대다수가 ‘Opple’이라고 하면, 그 순간부터 ‘Opple’이 ‘Apple’을 대체하는 것이다.
어린 시절, 환상특급이라는 외화는 이와 관련된 에피소드를 보여주었다. 지금도 기억나는 장면은, 주인공을 뺀 나머지 사람들이 ‘점심’이라는 말 대신에 ‘공룡’을 쓰고 있던 상황이다. 주인공은 혼란에 빠졌지만 다른 사람들은 태연했다. 주인공은 후에 ‘점심’이란 말 대신에 ‘공룡’을 썼다. 삼인성호(三人成虎)라고 했던가. 발화자가 언어를 규정한 셈이다. 언어가 발화자를 규정하는 게 아니다.
대학원 과정까지 합해서 12년 동안 영어를 공부하면서 왜 그리 문법적으로 틀리지 않으려고 집착했는지 모르겠다. 시험문제에서 하나라도 더 틀리지 않기 위해서 노력했던 것들이 우리를 ‘영어에 대한 완벽 콤플렉스’를 갖게 했다. 심지어 신문에서조차 실수를 하고, 방송에서도 잘못된 표현을 쓴다. 결국, 완벽한 언어라는 건 신기루일 따름이다.
어떤 유학생은 미국에서 자신의 질문이 문법적으로 오류가 있을까봐 아예 질문을 하지 못했다고 한다. 그런데 그는 본토 학생들이 강의 내용을 잘못 알아들어 엉뚱한 질문을 하는 경우를 종종 보았다고 한다. 만약 강의 내용의 핵심은 이해했지만 약간 틀린 문법으로 질문을 하는 외국학생과, 강의에 집중을 하지 않아 생뚱맞은 질문을 하는 본국학생이 있다면 누가 더 낫다고 할 수 있을까? 당연히 전자이다. 문제는 형식이라기보다는 알찬 내용이기 때문이다.
완벽한 영어, 콤플렉스이자 신기루
한국 사람이 사용하는 영어가 콩글리쉬라는 판정을 받는 세 번째 기준은 우리말을 영어로 그대로 번역한 표현이다. 언젠가 미국에서 공부하던 한국의 한 유학생이 잘못을 해서 미국인 교수님의 방에 불려가서 야단을 맞게 되었는데, “I have nothing to say.”라고 말해서 사태가 더욱 악화되었었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다. 그 학생이 의도한 것은 “뭐라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이었지만 그 교수님의 입장에선 “당신과 더 이상 얘기 하고 싶지 않습니다.”로 들렸기 때문이다. 이런 경우 잘못은 한국 학생의 영어 실력에 있는 것일까? 그렇지는 않다고 생각한다.
오늘날 우리가 영어를 배우는 이유가 무엇인가? 국제화 시대에 전 세계 여러 국적의 외국인들과 의사소통을 하기 위함이 아닌가? 다양한 문화를 가진 사람들이 영어를 사용하다 보면 서로 간의 문화 차이에서 발생되는 문제가 수도 없이 많을 것이다. 그럴 때마다 미국 영어와 문화의 잣대로 옳고 그름을 따질 것인가? 그럴 수는 없다. 오늘날과 같은 국제화 시대에선, 서로의 차이점을 인정하고 이해하려는 열린 마음이 필요하다. 그리고 이러한 노력을 원어민보다 몇 배나 많은 비원어민들만 해야 하는 시대는 지났다. 영어를 모국어로 사용하는 사람들 역시 노력해야 한다.
끝으로 한국 사람이 영어를 해서 콩글리쉬란 판정을 받는 또 하나의 기준은 바로 발음이다. 흔히 말하는 ‘된장 발음’을 하면 곧 바로 ‘콩글리쉬’ 혹은 ‘영어 못하는 사람’으로 찍힌다. 발음이 중요하지 않다고 말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발음은 중요하다. 하지만 발음보다는 문장 구조와 의미 전달이 더 중요하다. 발음도 좋으면 물론 좋겠지만 그렇다고 완전히 원어민과 똑같아야 하는 것은 아니다. 발음 때문에 고민하는 사람들 중에는 발음이 좋은 편인 사람도 많은데 이것은 발음이 원어민과 똑같아야 한다는 강박 관념 때문이다.
하지만 몇몇 국가를 제외하고는 원어민들도 발음이 서로 다른 경우가 많다. 한 가지 예를 들면 한 캐나다 친구가 몇 년 전에 유럽에 여행을 가서 스코틀랜드 친구를 만나 같이 지낸 적이 있는데, 둘 다 영어가 모국어이지만 발음과 악센트가 서로 달라서 익숙해지고 이해하기까지 1달이 걸렸다고 한다. 하지만 이 정도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그의 말처럼 ‘English is English.’여서 시간이 지나자 이해하는 데 별 문제가 없었다고 한다. 그리고 한국에서 생활하는 외국인들도 처음엔 한국 학생들의 영어를 이해하기가 어려웠지만 시간이 지나자 잘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는 말을 많이 한다. ‘Korean English’ 역시 ‘English’이다. 우리 발음에 좀 더 자신을 갖고 당당하게 말하자.
표준적인 영어는 없다
뉴욕주립대 하광호 교수는 미국에서, 표준영어(Standard English Dialect)라는 말보다는 주류사회에서 통용되는 영어(Main Stream English Form)이라는 말이 더 자주 쓰이고 있다고 지적한 바 있다. 다시 말해, 우리나라 사람들이 특히 환상을 가지고 있는 백인들의 형식적(formal)인 영어들은 표준이 아니라 주류에서 사용되는 언어일 뿐이라는 애기다. 하 교수는 미국, 영국, 오스트레일리아, 캐나다, 뉴질랜드, 아일랜드에서 사용되는 영어뿐만 아니라 각각 다른 모국어의 배경을 가진 사람들이 구사하는 영어들도 ‘영어’의 범주에 포함시켜야 한다고 강조했다.
따라서, ‘Korean-English’도 충분히, 아니 당당히 영어의 한 범주에 속한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하 교수는 단, 모국어 사용자가 들어서 이해하는 데 무리가 없을 때 그 범주에 들어간다고 지적했다. 그는 “멋진 소리를 내는 게 중요한 것이 아니라 정확한 소리를 내는 것이 중요하다.”고 꼬집었다. 한국 사람들이 앵글로색슨계처럼 발음을 구사할 수 없다. 그렇다고 ‘Korean-English’가 영어가 아닌 것은 아니다. 의사소통만 된다면 옆집 철수의 발화도 공식 영어로 간주할 수 있는 것이다.
한편, ‘영어’라는 보편성이 가능한가? 철학자 탁석산 씨는 “대학은 추상명사이므로 대학 자체를 손으로 만질 수는 없으며 눈으로 볼 수도 없다.”고 말했다. ‘영어’라는 것도 마찬가지다. ‘영어’는 추상명사이다. ‘Singlish’, ‘Indian-English’, ‘American-English’, ‘Japanese-English’, ‘Korean-English’ 등의 개별자들이 이루어져 ‘영어’라는 공통된 성질을 만들어 낸 것뿐이다. 탁석산 씨가 지적했듯이, 세계가 개별자들의 집합일 뿐 보편자의 예들의 집합은 아니며 “세계의 근본적 존재자는 개별자”인 것이다. 우리가 환상을 가지고 있는 ‘영어’라는 보편성은 대개, 미국식 영어 혹은 앵글로색슨 계열이 사용하는 영어이다. 하지만 이는 잘못된 문화이데올로기의 주입 때문이다. 보편적인 것이 지엽적인 미국에 국한될 수 없기 때문이다. 아울러, 언어는 자연과학이 아니며 의미에 따라 달라지기 마련이기 때문에 보편성은 더더욱 가능하지 않다.
John Algeo와 Thomas Pyles가 지은 <영어의 기원과 발달>에서는 다음과 같은 지적이 나온다. “각각의 국가 변이(영어 변이들)는 그 자체적인 특성을 가지고 있으며 세계의 영어에 기여하고 있다.” 또한 오세웅 교수는, Black English 혹은 Ebonics라는 명칭이 붙은 흑인 영어도 하나의 영어로 인정하자는 움직임이 활발해지고 있다고 전했다. 그 전에는 공식영어로 인정하지 않았다는 뜻이다. 그러나 2006년, 우리는 윌 스미스가 구사하는 영어를 당연히 영어로 간주하고 있다. 마찬가지로 ‘Korean-English’도 세계의 영어에 한 몫을 하고 있다. 한국 사람들이여! 당신들은 움츠러든 어깨를 펼 필요가 있다.
/김정훈 영어강사(영어지도학 석사), 김재호 기자
원어민이 비원어민을 이해하려고 노력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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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핸드폰’은 콩글리쉬야, ‘cell phone’이나 ‘mobile phone’이라고 해야 정확한 영어야.”
“저 사람은 발음이 완전히 콩글리쉬다.”
모두가 아는 바와 같이 '콩글리쉬'는 Korean English를 줄여서 만든 용어인데 일반적으로 한국 사람들이 사용하는 ‘잘못된, 틀린 영어’라는 부정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다. 그래서 콩글리쉬를 써선 안 된다고 주장하면서 콩글리쉬를 고쳐주겠다는 제목의 책이나 교육 프로그램도 많이 등장 했었다. 지금도 영어를 익히려고 노력하는 우리나라 사람이 가장 듣기 싫은 말은 아마 “그 사람 영어는 콩글리쉬다.”일 것이다. 누구나 싫어하는 콩글리쉬, 그러면 콩글리쉬는 과연 무엇일까?
사람들이 흔히 콩글리쉬라고 판단하는 기준을 보면 첫째로 한국 사람들이 만들어서 사용하지만 원어민들은 사용하지 않는 표현들이 있다. 앞에서 언급한 ‘핸드폰’, ‘아이쇼핑’, ‘백미러’ 등이 그러한 예이다. ‘핸드폰’은 ‘cell phone’이라고 해야 하고, ‘아이쇼핑(eye shopping)’은 ‘window shopping’이라고 해야 하고, ‘백미러(back mirror)’는 ‘rear view mirror’라고 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말이 정말 잘못된 표현이라서 원어민은 이해를 못할까? 가깝게 지내는 미국인 친구에게 물어보았더니 모두 정확하게 이해한다고 했다. 그래서 처음에 이 말을 들었을 때는 어땠냐고 다시 물어 보았다. 대답은 이해하는 데 문제가 없었다는 것이다. 이 말을 이해할 수 있는 문맥이 주어져서 쉽게 알아차렸겠지만 그의 대답은 “English is English.”였다.
우리가 가진 귀중한 유산 중에는 기존의 영어로는 표현 할 수 없는 것들이 많이 있다. 우리나라 고유의 아름다운 시, 문학, 음식, 예술 등을 세계에 알리기 위해서는 우리가 Korean English를 개발하여 사용할 수밖에 없다. 이젠 어떻게 미국 사람과 똑같은 영어를 사용할 수 있을까 보다 영어로 어떻게 우리의 것을 잘 전달할 것인지에 좀더 고민을 할 때가 아닌가 생각한다.
미국 라이더 대학의 오세웅 교수는 다음과 같이 지적한 바 있다. “미국식, 영국식 영어를 따라가려고 모방에만 힘쓰지 말고 영어를 우리 것으로 만들어 새로운 이야기를 하고, 새로운 영어를 창조하여 우리 것으로 하는 것이 한국에서 영어 좀 한다는 사람들의 의무일 것이다.” 우리식 영어는 고사하고, 영어식 어투가 우리의 말에까지 침투하는 것을 볼 때 정말 중요한 지적이 아닐 수 없다.
오 교수는 헤어지는 인사말로 “Days of Calm for you!(조용한 나날 보내시길 바랍니다)”라는 새로운 표현을 시도한다고 했다. 한국식의 새로운 영어 인사말을 만들어 본 것이다. 이는 영어를 창조적으로 수용한 결과이다. ‘Korean-English’가 만들어진 순간이다. 그러나 여전히 콩글리쉬라는 말 자체에 담겨 있는 부정적인 인상을 감출 수 없다. 과연 ‘Korean-English’는 단지 콩글리쉬일 뿐일까.
모 방송에서 영어를 희화화 하면서 많은 인기를 누린 적이 있다. “그때그때 달라요.”라는 유행어는 삽시간에 전국으로 퍼져나갔다. 지금도 한 개그프로그램에서는 영어 발음을 가지고 사람들을 즐겁게 해주고 있다. 이와 같은 현상들을 보면서 거꾸로 우리나라 사람들이 영어로부터 얼마나 많은 스트레스를 받아왔는지 생각해봤다. 영어와 관련한 개그가 유행 하는 건 그만큼 한국 사람들이 영어에 대해서 각자 한마디씩 하고 싶을 만큼 고민을 해왔다는 얘기가 된다. 이제는 영어에 대한 과도한 집착에서 벗어나 ‘Korean-English’를 고민해 볼 때이다. 창조적인 영어 수용이 필요한 시점이라는 뜻이다.
영어를 창조적으로 수용하자
두 번째 문법적으로 틀린 표현을 쓰는 경우 콩글리쉬라고 간주한다. 어순에 있어서 한국어의 어순으로 ‘나는 밖으로 나갔다.’를 ‘I went outside.’라고 하지 않고 ‘I outside went.’와 같이 사용하는 경우이다. 이런 것은 영어를 처음 배울 때 할 수 있는 실수로 어느 정도 기간이 지나면 고쳐지게 마련이다. 그런데 큰 문제가 없는 영어 문장임에도 문법 규칙을 지나치게 따져서 잘못된 표현이라고 생각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아래의 문제를 보자. 한 남자가 열심히 노력해서 돈을 벌어 자신의 집을 지었다. 이런 경우 영어로 어떻게 표현하면 좋을까?
(1) He built his house. (2) He had his house built.
정확하게 말하면 두 번째 문장이 맞지만(그가 자기 손으로 직접 집을 지은 것은 아니므로) 원어민들은 첫 번째 문장도 별문제가 없다고 생각한다고 한다. 사람들이 대화를 할 때, 단어와 문장만을 사용해서 의사소통을 하는 것이 아니라 배경지식과 문맥도 활용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우리말을 사용 할 때도 저 정도의 유연성은 있지 않은가? 언어를 사용하는 데 있어 기본적인 규칙은 지켜야 하겠지만 지나치게 법칙에 연연하다 보면 언어의 본래 기능인 의사소통의 효율이 떨어질 수 있다. 영어도 우리말과 같은 언어에 불과하다는 것을 기억하고 조금은 관대해지자.
언어라는 것은 매 순간 바뀌게 마련이다. 지금 이 글을 쓰는 순간에도 언어 사용자들은 새로운 생각을 하고, 색다른 표현을 사용한다. 영어도 언어의 한 종류인 이상, 이러한 법칙에서 벗어날 수 없다. 많은 사람들에게 지금 통용되고 있는 ‘Apple’대신에 대다수가 ‘Opple’이라고 하면, 그 순간부터 ‘Opple’이 ‘Apple’을 대체하는 것이다.
어린 시절, 환상특급이라는 외화는 이와 관련된 에피소드를 보여주었다. 지금도 기억나는 장면은, 주인공을 뺀 나머지 사람들이 ‘점심’이라는 말 대신에 ‘공룡’을 쓰고 있던 상황이다. 주인공은 혼란에 빠졌지만 다른 사람들은 태연했다. 주인공은 후에 ‘점심’이란 말 대신에 ‘공룡’을 썼다. 삼인성호(三人成虎)라고 했던가. 발화자가 언어를 규정한 셈이다. 언어가 발화자를 규정하는 게 아니다.
대학원 과정까지 합해서 12년 동안 영어를 공부하면서 왜 그리 문법적으로 틀리지 않으려고 집착했는지 모르겠다. 시험문제에서 하나라도 더 틀리지 않기 위해서 노력했던 것들이 우리를 ‘영어에 대한 완벽 콤플렉스’를 갖게 했다. 심지어 신문에서조차 실수를 하고, 방송에서도 잘못된 표현을 쓴다. 결국, 완벽한 언어라는 건 신기루일 따름이다.
어떤 유학생은 미국에서 자신의 질문이 문법적으로 오류가 있을까봐 아예 질문을 하지 못했다고 한다. 그런데 그는 본토 학생들이 강의 내용을 잘못 알아들어 엉뚱한 질문을 하는 경우를 종종 보았다고 한다. 만약 강의 내용의 핵심은 이해했지만 약간 틀린 문법으로 질문을 하는 외국학생과, 강의에 집중을 하지 않아 생뚱맞은 질문을 하는 본국학생이 있다면 누가 더 낫다고 할 수 있을까? 당연히 전자이다. 문제는 형식이라기보다는 알찬 내용이기 때문이다.
완벽한 영어, 콤플렉스이자 신기루
한국 사람이 사용하는 영어가 콩글리쉬라는 판정을 받는 세 번째 기준은 우리말을 영어로 그대로 번역한 표현이다. 언젠가 미국에서 공부하던 한국의 한 유학생이 잘못을 해서 미국인 교수님의 방에 불려가서 야단을 맞게 되었는데, “I have nothing to say.”라고 말해서 사태가 더욱 악화되었었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다. 그 학생이 의도한 것은 “뭐라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이었지만 그 교수님의 입장에선 “당신과 더 이상 얘기 하고 싶지 않습니다.”로 들렸기 때문이다. 이런 경우 잘못은 한국 학생의 영어 실력에 있는 것일까? 그렇지는 않다고 생각한다.
오늘날 우리가 영어를 배우는 이유가 무엇인가? 국제화 시대에 전 세계 여러 국적의 외국인들과 의사소통을 하기 위함이 아닌가? 다양한 문화를 가진 사람들이 영어를 사용하다 보면 서로 간의 문화 차이에서 발생되는 문제가 수도 없이 많을 것이다. 그럴 때마다 미국 영어와 문화의 잣대로 옳고 그름을 따질 것인가? 그럴 수는 없다. 오늘날과 같은 국제화 시대에선, 서로의 차이점을 인정하고 이해하려는 열린 마음이 필요하다. 그리고 이러한 노력을 원어민보다 몇 배나 많은 비원어민들만 해야 하는 시대는 지났다. 영어를 모국어로 사용하는 사람들 역시 노력해야 한다.
끝으로 한국 사람이 영어를 해서 콩글리쉬란 판정을 받는 또 하나의 기준은 바로 발음이다. 흔히 말하는 ‘된장 발음’을 하면 곧 바로 ‘콩글리쉬’ 혹은 ‘영어 못하는 사람’으로 찍힌다. 발음이 중요하지 않다고 말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발음은 중요하다. 하지만 발음보다는 문장 구조와 의미 전달이 더 중요하다. 발음도 좋으면 물론 좋겠지만 그렇다고 완전히 원어민과 똑같아야 하는 것은 아니다. 발음 때문에 고민하는 사람들 중에는 발음이 좋은 편인 사람도 많은데 이것은 발음이 원어민과 똑같아야 한다는 강박 관념 때문이다.
하지만 몇몇 국가를 제외하고는 원어민들도 발음이 서로 다른 경우가 많다. 한 가지 예를 들면 한 캐나다 친구가 몇 년 전에 유럽에 여행을 가서 스코틀랜드 친구를 만나 같이 지낸 적이 있는데, 둘 다 영어가 모국어이지만 발음과 악센트가 서로 달라서 익숙해지고 이해하기까지 1달이 걸렸다고 한다. 하지만 이 정도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그의 말처럼 ‘English is English.’여서 시간이 지나자 이해하는 데 별 문제가 없었다고 한다. 그리고 한국에서 생활하는 외국인들도 처음엔 한국 학생들의 영어를 이해하기가 어려웠지만 시간이 지나자 잘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는 말을 많이 한다. ‘Korean English’ 역시 ‘English’이다. 우리 발음에 좀 더 자신을 갖고 당당하게 말하자.
표준적인 영어는 없다
뉴욕주립대 하광호 교수는 미국에서, 표준영어(Standard English Dialect)라는 말보다는 주류사회에서 통용되는 영어(Main Stream English Form)이라는 말이 더 자주 쓰이고 있다고 지적한 바 있다. 다시 말해, 우리나라 사람들이 특히 환상을 가지고 있는 백인들의 형식적(formal)인 영어들은 표준이 아니라 주류에서 사용되는 언어일 뿐이라는 애기다. 하 교수는 미국, 영국, 오스트레일리아, 캐나다, 뉴질랜드, 아일랜드에서 사용되는 영어뿐만 아니라 각각 다른 모국어의 배경을 가진 사람들이 구사하는 영어들도 ‘영어’의 범주에 포함시켜야 한다고 강조했다.
따라서, ‘Korean-English’도 충분히, 아니 당당히 영어의 한 범주에 속한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하 교수는 단, 모국어 사용자가 들어서 이해하는 데 무리가 없을 때 그 범주에 들어간다고 지적했다. 그는 “멋진 소리를 내는 게 중요한 것이 아니라 정확한 소리를 내는 것이 중요하다.”고 꼬집었다. 한국 사람들이 앵글로색슨계처럼 발음을 구사할 수 없다. 그렇다고 ‘Korean-English’가 영어가 아닌 것은 아니다. 의사소통만 된다면 옆집 철수의 발화도 공식 영어로 간주할 수 있는 것이다.
한편, ‘영어’라는 보편성이 가능한가? 철학자 탁석산 씨는 “대학은 추상명사이므로 대학 자체를 손으로 만질 수는 없으며 눈으로 볼 수도 없다.”고 말했다. ‘영어’라는 것도 마찬가지다. ‘영어’는 추상명사이다. ‘Singlish’, ‘Indian-English’, ‘American-English’, ‘Japanese-English’, ‘Korean-English’ 등의 개별자들이 이루어져 ‘영어’라는 공통된 성질을 만들어 낸 것뿐이다. 탁석산 씨가 지적했듯이, 세계가 개별자들의 집합일 뿐 보편자의 예들의 집합은 아니며 “세계의 근본적 존재자는 개별자”인 것이다. 우리가 환상을 가지고 있는 ‘영어’라는 보편성은 대개, 미국식 영어 혹은 앵글로색슨 계열이 사용하는 영어이다. 하지만 이는 잘못된 문화이데올로기의 주입 때문이다. 보편적인 것이 지엽적인 미국에 국한될 수 없기 때문이다. 아울러, 언어는 자연과학이 아니며 의미에 따라 달라지기 마련이기 때문에 보편성은 더더욱 가능하지 않다.
John Algeo와 Thomas Pyles가 지은 <영어의 기원과 발달>에서는 다음과 같은 지적이 나온다. “각각의 국가 변이(영어 변이들)는 그 자체적인 특성을 가지고 있으며 세계의 영어에 기여하고 있다.” 또한 오세웅 교수는, Black English 혹은 Ebonics라는 명칭이 붙은 흑인 영어도 하나의 영어로 인정하자는 움직임이 활발해지고 있다고 전했다. 그 전에는 공식영어로 인정하지 않았다는 뜻이다. 그러나 2006년, 우리는 윌 스미스가 구사하는 영어를 당연히 영어로 간주하고 있다. 마찬가지로 ‘Korean-English’도 세계의 영어에 한 몫을 하고 있다. 한국 사람들이여! 당신들은 움츠러든 어깨를 펼 필요가 있다.
/김정훈 영어강사(영어지도학 석사), 김재호 기자
출처 : 콩글리쉬 vs 코리안 잉글리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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