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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대왕과 개기일식

하얀제비 2006. 4. 5. 13:04

세종대왕과 개기일식


사이언스타임즈 라운지

1422년 정월 초하루 오후, 창덕궁 인정전 뜰 앞에는 소복을 입은 대신들이 모여 있었다. 세종대왕 역시 소복을 입고 그들과 함께 서 있었다. 모두 하늘을 바라보며 무엇인가 기다리는 듯 초조한 표정이었다.
잠시 후 하늘에선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태양의 서쪽 부분으로 낮달이 겹치기 시작한 것이다. 차츰 달이 태양을 가려 태양이 초승달 모양으로 변해가자 하늘은 어두운 회색이 되었다. 바람결에 흔들리던 나뭇잎마저 숨을 멈추고 그 광경을 지켜보았다.

주변이 조용해지고 기온이 내려가 으스스해질 무렵 태양의 가장자리가 달의 골짜기 사이로 비추어져 목걸이처럼 빛나 보였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태양은 달 뒤로 완전히 모습을 감추었다.
어두워진 태양 주위로 달무리 같은 하얀 빛이 넓게 퍼지며, 반대편 하늘에선 밝은 별이 모습을 드러냈다. 이윽고 몇 분의 시간이 지난 후 다시 태양의 서쪽 부분에서 빛이 드러나기 시작하고, 약 1시간 후에는 달이 태양의 동쪽 가장자리에서 완전히 떨어져 나갔다.

세종 4년 때인 이날 일어난 일식은 달그림자가 해를 완전히 가리는 개기일식이었으며, 우리나라 전역에서 관찰할 수 있었다.

옛날만 해도 일식은 모든 생명력의 원천인 태양에 나타나는 이상 현상으로서 두려움의 대상이었다. 우리나라에서는 태양이 제왕을 상징한다고 믿었으므로, 일식 현상은 곧 제왕이 빛을 잃는 것으로 여겨 흉조라고 생각했다.

<고려사>에 의하면 이와 같은 재앙을 예방하기 위해서 일식이 일어나는 동안에는 백관들이 소복을 입고 북을 울렸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날 세종대왕이 대신들과 함께 뜰 앞에 모인 것도 구식의(救蝕儀)를 올리기 위해서였다.

통치자의 입장에서 왕을 상징하는 해가 가리어지는 것은 불길한 징조였기에 태양이 다시 나오길 기원하는 의식을 올린 것이다. 하지만 그날 행사에서는 약간의 문제가 있었다. 기상 관측을 담당하는 서운관에서 이미 3개월 전에 미리 예보한 시간보다 15분 늦게 일식이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왕을 15분이나 기다리게 한 것은 물론 일식 시간이 틀린다는 건 불길한 징조를 맞는 왕이 제대로 반성하지 않는다는 의미가 된다. 그런 이유로 담당 관리는 식이 끝난 후 곤장형에 처해졌다. 그러나 그건 담당 관리의 잘못이 아니었다.

당시만 해도 중국에서 만든 역법으로 일식 시간을 추정했는데, 중국과 우리나라의 시차 때문에 일어난 해프닝이었다. 이 사건을 계기로 세종대왕은 ‘조선은 중국과 다르다’는 사실을 깨닫고 우리 현실에 맞는 체계를 정비하기 시작했다. 우리 실정에 맞는 법률을 정비하고 우리 음악인 정악의 체계를 가다듬어 나간 것이다. 또 우리 문자 ‘훈민정음’을 창제하기로 결심한 것도 그 사건이 계기가 되었다.

이처럼 과학지식이 없던 옛날에 두려움의 대상이던 일식이 요즘엔 꿈과 평화의 메시지로 여겨지고 있다. 지난 29일 개기일식을 보며 지구촌 사람들은 잠시나마 해와 달이 펼치는 환상적인 우주 쇼에 시름을 덜었다.

가난과 질병에 신음하는 아프리카 어린이들도, 오랜 전쟁에 지친 이라크인들도 모두 하늘을 바라보았다. 토고는 일식 때문에 그날을 임시공휴일로 지정하는가 하면 요르단은 휴교를 하기도 했다.

이번 일식은 브라질 서부 해안에서 처음으로 시작하여 대서양을 지나 아프리카 가나, 니제르, 나이지리아, 리비아, 이집트를 통과하여 지중해, 중앙아시아를 지나 북몽골에서 해질녘에 끝났다. 수만 명의 관광객들이 개기일식을 보기 위해 이들 지역을 찾았다. 지구에 드리우는 달그림자의 지름은 270km 이하로 짧아 개기일식은 보통 폭 100km의 개기일식대에서만 관측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모처럼 개기일식이 일어난다 해도 태양과 달의 연장선에 정확히 위치하는 지역에서 조금만 벗어나도 부분일식으로 관찰된다. 우리나라에서 개기일식을 볼 수 있는 때는 2035년 9월 2일 오전 9시 40분경으로 예정되어 있다. 하지만 달이 태양을 완전히 가리는 개기일식을 관찰할 수 있는 지역은 북한의 평양과 원산을 잇는 부근 지역으로 한정된다.

개기일식을 계기로 우리 현실을 깨달은 세종대왕의 혜안을 한번쯤 되새겨 볼 만하다.



/이성규 편집위원  yess01@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