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거일의 SF소설 - 역사 속의 나그네](202회)
(202회) 제 8부 혁명가
제 5장
“그러하시면, 원슈님,” 앞줄에 앉은 역쟝(驛長) 쳔영셰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사람들의 눈길이 일제히 쳔의 얼굴로 쏠렸다. 벗겨진 이마에 튀어나온 광대뼈, 숱이 많은 구레나룻, 개기름이 흐르는 거무튀튀한 살결하며 가라앉은 콧등이 억센 느낌을 주었다. 어느 모로 보나 녹록지 않은 사내였다.
“챵의군께셔는 말만 거두시고,” 쳔이 마른 침을 삼켰다. “여긔 역에 말이 없어도, 쇼인달히 시방 가잔 논밭안 모도 그대로 가잘 수 이시다 하난 말쌈이시니잇가?”
“녜. 그러하나이다.” 언오는 목소리에 힘을 주어 대꾸했다. “시방 여러분들께셔 가자신 논밭안 모도 여러분들 것이니이다. 앞아로 여러분들희 재산이 다욀 새니이다. 그리하고 내죵애난 여러분들희 자식달히 믈려받알 새니이다.”
“이대 알겠압나니이다. 원슈님, 참아로 감샤하압나니이다.” 쳔의 낯빛이 좀 밝아졌다. 다른 사람들이 서로 쳐다보면서 고갯짓을 했다.
쳔의 걱정은 이해할 만했다. 말이 없으면, 여기 역이 제구실을 할 수 없고, 역리(驛吏)들도 필요 없을 터였다. 따라서 말을 징발한 챵의군이 역리들에게 지급되었던 땅까지 거두어가겠다고 나올 수도 있었다.
“멀디 않아셔, 여긔 일흥역에는 다시 말달히 이시게 다욀 새니이다. 시방 우리 챵의군은 역을 없애고 말달할 아조 거두어가난 것이 아니오이다. 사람달히 사난 곳애난 역이 이셔야 하나이다. 우리 챵의군의 행군이 그쳐셔 다시 사람달히 왕래하개 다외면, 다시 역을 세우겠나이다. 그때난 우리 말달할 이곳아로 다려오겠나이다. 지금 다려가난 바로 그 말달한 아닐디 모라디만.“ 말을 잠시 멈추고, 웃음 띤 얼굴로 그는 마당에 쪼그려 앉은 사람들을 둘러다보았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의 얘기에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굳은 얼굴로 그의 눈길을 애써 피했다.
그는 이 사람들로부터 자신의 가벼운 농담에 대한 반응을 기대한 것이 무리였음을 깨달았다. 이곳 사람들이 해학을 몰라서 그런 것은 아니었다. 이곳 사람들은 현대 조선 사람들만큼 해학을 즐겼다. 물론 그들이 즐기는 해학이 현대의 직업적 익살꾼들이 만들어내는 날카로운 재담과는 달랐지만. 그러나 스스로를 ‘호셔챵의군’이라 부르는 사람들이 갑자기 나타나서 역에 있는 말들을 징발하겠다고 나선 지금, 그들은 그 사람들의 우두머리가 하는 농담을 즐길 마음이 나지는 않을 터였다. 그들의 낯빛이 처음보다는 많이 풀렸지만, 그들의 마음은 아직 두려움으로 가득할 터였고, 아마도 자신들의 일상적 삶을 위협하는 챵의군에 대한 유감도 작지 않을 터였다.
다행히, 말을 징발할 때, 폭력을 쓸 필요는 없었다. 느닷없이 밀어닥친 서른 넘는 군사들 앞에서 역에 있던 사람들은 저항할 생각을 품지 못했다. 그리고 시흥도의 역승(驛丞)과 역쟝들에게 그들이 가진 말들을 모두 챵의군에 넘기라는 군령 제6호와 그 군령에 따라 만들어진 자문은 관부 문서의 모습을 제대로 갖추었고 역에 있던 사람들이 챵의군 원슈의 지시에 순순히 따르도록 도왔다.
“그러하나 그리 하난 대난 날달이 졈 걸윌 새니이다. 그때까장안 지금토록 하시던 것텨로 시방 가자신 논밭애 녀름을 지으쇼셔.” 잠시 뜸을 들인 다음, 그는 쳔에게 물었다. “녀름짓는 일안 엇디 다외얏나니잇가? 논애 씨난 다 쁘리샷나니잇가?”
“녜, 원슈님. 어제까장 다 쁘리얏압나니이다.”
“아, 녜.” 그는 사람들을 둘러다보았다. “쇼쟝애게 더 물어보실 일이 이시나니잇가?”
사람들이 서로 얼굴을 쳐다보았다. 이어 나지막하게 웅얼거리는 소리가 났다. 그러나 정작 그에게 무엇을 물어보려는 사람은 없었다.
“그러하면 이제 모단 일달히 다 뎡하야뎠나이다. 그러나한듸 우리 챵의군이 례산 읍내로 돌아가기 젼에, 쇼쟝이 여러분들께 드릴 말쌈이 하나 이시나이다. 시방 녀름지을 철이라, 모도 밧바디마난, 우리 챵의군에셔 말달할 쓰는 사이애난, 여긔 겨신 분들께셔 하실 일달히 그리 하디난 아니할 새니이다. 그러나 우리 챵의군에는 할 일달히 아조 하나이다. 여러분들텨로 말알 이대 보살피고 달홀 줄을 아난 사람달한 할 일이 아조 하나이다.”
그가 하려는 얘기가 중요하다는 것을 느낀 듯, 사람들이 문득 긴장했다. 모두 눈빛이 또렷해졌다. 자세를 고쳐 앉는 사람들도 있었고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하는가 슬그머니 훔쳐보는 사람들도 있었다.
“우리 챵의군은 모단 사람달히 사람다이 살 수 이시게 하려 니러셨나이다.” 그는 목소리를 좀 낮추어 말을 이었다. “이 셰샹알 모단 사람달해게 살기 됴한 곳아로 맹갈려 니러셨나이다. 권셰를 가잤고 논밭알 많이 가잔 냥반달해게만 살기 됴한 셰상이 아니라, 신분이 쳔하고 가잔 것 없난 사람달해게도 살기 됴한 셰상알 맹갈려 니러셨나이다. 이미 여러분들께셔 보샷겠디마난, 바로 그러한 녜아기가 여긔 ‘챵의문’에 쓰여 있나이다.” 그는 몸을 돌려 벽에 붙여진 ‘챵의문’을 가리켰다. 그 옆에 신경슈가 쓴 한문 ‘챵의문’이 붙어 있었다.
“나이 한 디위 읽어보겠나이다.” 역에 있는 사람들은 글자를 조금씩은 깨우쳤을 듯했지만, 모두 ‘챵의문’을 읽고 그 뜻을 새겼을 것 같지는 않았다.
“시방 우리 나라해셔는 사람달히 힘까장 일하야도, 사람다이 살기 어렵도다. 그러하야셔 뜯이 이시난 사람달한 모도 나라랄 걱뎡하고 있도다...” 그는 자신의 목소리가 글의 운율을 타고서 차츰 낭랑해지는 것을 느꼈다. 그는 지금 ‘챵의문’을 거의 외고 있었다.
“...우리와 뜯을 함께하려는 사람달한 머뭇거리디 말디어다. 챵의군에 들어와셔 나라랄 디키고 님굼을 도와셔 백셩을 편히 하기랄 바라노라.” 읽기를 마친 그의 귓속에 여운이 길게 남았다.
잠시 마당에 정적이 무겁게 깔렸다. 참을성있게 쪼그려 앉아서 그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인 사람들의 패랭이와 어깨 위에 햇살이 조용히 내리고 있었다. 뒤쪽 방목장에서 날아온 말 울음 한마디가 정적의 긴 자락을 휘젓고 사라졌다. 그의 목소리가 건 주술에서 깨어나는 것처럼, 사람들이 고개를 움직였다.
‘만일 아무도 나서지 않는다면...’ 어느 후미진 곳에서 문득 나타난 두려움이 가슴을 움켜쥐었다. 사람들의 얼굴들이 흔들리더니 아득히 멀어졌다. 만일 그가 챵의군에 들어오도록 일흥역 사람들을 설득하지 못한다면, 그런 실패의 부정적 영향은 꽤 클 터였다. 어저께 김항?C(텨ㄹ)끈 수색대는 무한쳔 하류의 창고들에 든 곡식들을 배를 구해서 많이 실어왔을 뿐 아니라, 례산현창의 고지기들을 여섯이나 챵의군에 들어오도록 설득해서 데려왔다. 이제 사람들은 모두 그가 일흥역의 사람들에 대해 같은 일을 하리라고 기대할 터였다.
‘당연히 비교하겠지, 내가 한 일과 김총독이 한 일을. 만일 내가 김총독보다... 아니지, 그 정도가 아니지. 원슈는 총독보다 일을 훨씬 잘 하리라고 모두 여길 테니. 여기 있는 사람들을 몇 설득해서 데려가는 것으론 부족하지.’
숨쉬기 거북할 만큼 가슴이 답답했다. 그는 지금 챵의군 안에서 자신의 권위가 절대적이며 누구도, 김항?C(텨ㄹ)도, 그의 경쟁 상대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다른 사람은 몰라도, 김은 믿을 수 있었다. 그러나 그의 모병 실적이 김의 그것과 비교되리라는 생각과 원슈의 체면을 세울 만큼 성공적으로 모병하기는 어려우리라는 판단은 조금 전까지만 하더라도 생각하기 어려웠을 만큼 무겁게 그의 마음을 눌렀다.
“공자님께셔는 슈신한 뒤헤야 졔가하고 졔가한 뒤헤야 티국하고 티국한 뒤헤야 비르소 텬하랄 평안히 할 수 이시다 하샷나이다.” 다행히, 목소리는 매끄럽게 나왔다. 그는 마음을 가다듬었다. 부연 물결처럼 흔들리던 얼굴들이 차츰 또렷해졌다.
“그러모로 텬하랄 평안하개 맹갈려고 니러션 우리 챵의군은 응당 몬져 스스로 닦아야 하나이다. 그러하야셔 우리 챵의군이 이 셰상애 너비 펴려 하난 뜯을 몬져 우리 안해셔 펴고 이시나이다. 우리 챵의군 안해셔는 모단 사람달히 똑같이 대졉알 받나이다. 맛단 일알 이대 하면, 신분이 쳔한 사람이라도 높안 자리애 오랄 수 이시나이다. 실로난 쇼쟝안 그젓긔까장만 하야도, 불승이얏나이다. 냥반달히 낮이 녀기는 중이얏나이다. 쇼쟝안 어젓긔 비르소 환속하얏나이다. 그리하고 쇼쟝 바로 밑애 이시난 륙군 총독안 한셩에셔 번을 셔다 부친 샹알 당하야 집애 나려왔던 군사이니이다. 냥반이 아니이다. 다란 대쟝달도 모도 그러하나이다.”
그는 왕부영의 얘기를 꺼내려다가 그만두었다. 왕이 스스로 얘기하는 편이 오히려 좋을 것 같았다. 얘기를 매끄럽게 마무리하는 길을 찾아내고서, 그는 목소리를 높였다. “여러분, 엇던 군사이 미덥고 부즈런하고 하난 일애 재조이시면, 그 군사난 신분을 관계티 아니 하고, 냥반이든 샹인이든 쳔인이든, 높안 품계를 받고 대쟝이 다욀 수 이시나이다.”
사람들은 말이 없었지만, 얼굴들에는 흥미가 어렸다. 누가 조심스럽게 낸 헛기침이 크게 들렸다.
“여러분.” 사람들을 한 번 둘러다본 다음, 그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쇼쟝의 녜아기랄 아시겠나니잇가?”
“녜,” 쳔영셰가 대꾸하자, 서넛이 따라 대꾸했다.
“그러하시면 우리 챵의군이 엇더한가 다란 사람달해게셔 들어보쇼셔.” 그는 토방 한쪽에 선 왕부영을 찾았다. “왕대쟝.”
“녜, 원슈님.”
“이리 오쇼셔. 그리고 김대쟝도 이리 오쇼셔,” 그는 김교듕도 불렀다.
“여러분, 여긔 션 분이 왕부영 대쟝이시니이다. 우리 챵의군의 오듕대 이단대랄 잇그시나이다. 이제 왕대쟝?迦? 우리 챵의군이 엇던 사람들로 이루어뎠는디 여러분들께 말쌈드릴 새니이다.” 사람들이 손뼉을 쳐서 왕부영을 환영하리라 기대하면서, 그는 말을 멈추었다.
그러나 사람들은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왕이 읍을 했어도, 모두 말끄러미 왕을 올려다보았다.
속으로 고개를 끄덕이면서, 그는 김을 가리켰다. “이분은 김교듕 대쟝이시니이다. 문셔 참모부를 잇그시나이다. 김대쟝께셔는 여러분들께 우리 챵의군의 품계와 봉록과 갇한 일달알 말쌈드릴 새니이다.”
김이 읍했다. 역시 사람들은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자아, 우리 모도 손뼉을 텨셔 두 분을 환영하사이다,” 한걸음 물러서면서, 그는 먼저 손뼉을 쳤다.
그제서야 사람들이 손뼉을 치기 시작했다. 분위기가 이내 바뀌었다. 사람들의 굳었던 낯빛들과 몸들이 풀렸다. 사람들이 드러내놓고 수근거리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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