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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의 남자’ 촬영지, 수원화성에 가다
하얀제비
2006. 4. 5. 12:56
‘왕의 남자’ 촬영지, 수원화성에 가다
2008년 3월, 수원화성 박물관 개관 예정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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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르는 길이 꽤 만만치 않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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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원화성(수원성) ⓒ연합뉴스 |
마음속으로만 그리던 화성(華城)에 와 있다. 이름부터 참 아름다운 곳이다. 국사시간에 졸지 않은 덕분으로 수원화성 축조를 무대로 한 나만의 사극 시나리오를 간직하고 있다. 조선시대의 명군(名君)으로 꼽히는 정조와 젊고 패기 넘치는 신지식인 다산의 멋들어진 군신관계는 나를 설레게 한다. 표면적인 목표는 효의 실현이었으나 실은 수원의 행궁 건설을 통해 조선의 새로운 향방을 결정지으려 했던 현명한 군주의 야망을 직접 두 눈으로 확인하고 싶었다. 또한 수원화성 축조과정 곳곳에 녹아들어 갔을 백성을 걱정하는 마음도 목격하고 싶었다.
“그런데 과학유산답사라니? 수원 화성하면 다산 정약용이랑 거중기밖에 생각 안 나는데. 뭐 새로울 게 있으려나. 다른 것도 있는데 유독 수원 화성을 가자고 한 이유가 뭐야?”
코트를 결국 벗어 팔에 걸며 J가 묻는다. 우리나라 전통 유산을 과학적 시선으로 재발견해 보자는 거창한 목표를 가지고 한 번 놀러가자는 말로 꼬여냈는데 영 마뜩찮은가 보다.
“글쎄, 사실 건축만큼 옛사람들의 과학기술적 사고방식을 총체적으로 드러내는 것도 드물지 않을까 하는 생각 때문이야. 특히 화성이 지어지면서 조선시대의 목조 위주의 건축양식에 많은 변화가 생겼다는 기록이 있어. 그리고 우리가 흔히 거중기만 생각하는데 그 외에도 다른 과학적인 원리를 이용한 기구가 기록으로 남아 있대.”
“다른 게 또 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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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원화성(수원성) ⓒ연합뉴스 |
현대식으로 축척을 표시하지 않아 삽도만으로는 각각의 크기를 알 수 없지만 기록에서 따로 정확한 수치를 제시하고 있어 지금도 그대로 재현해 볼 수 있을 정도라 한다. 지금 수원 화성의 많은 부분이 중건(重建)된 것임에도 불구하고 세계문화유산에 당당히 등록된 이유도 사용된 기계, 건축물의 내외도(內/外圖), 공사 전반에 걸친 모든 정보들을 자세하게 기록하고 있기 때문이다.
“몇 가지가 있지만, 그 중 하나만 보자. 거중기와 함께 짝으로 <녹로>라는 기계가 잘 사용되었는데, 이것도 도르래를 사용한 것이야. 원리 자체는 지금 보면 단순하지. 고정 도르래를 이용해서 가하는 힘의 방향을 바꾸었어. 하지만 이렇게 단순한 원리의 기구도 1980년대까지 건축할 때 흔히 사용되었다고 해.”
천천히 걸어 행궁 안으로 들어서니 문 안쪽에 실제 크기로 재현한 거중기가 반갑게도 서 있었다. 움직도르래 여러 개와 고정도르래 여러 개를 차례로 번갈아 연결하여 한 번에 들이는 힘을 크게 줄였다. 원리 자체는 누구라도 알 수 있을 만큼 간단하지만 재현된 거중기의 모습은 지금의 눈에도 충분히 감탄스럽다. 움직도르래 여러 개를 하나의 막대기에 묶어 벽돌의 하중을 움직도르래 여러 개가 한 번에 견디게 한 설계가 멋지다.
그리고 벽돌을 들어 올리는 힘점을 양 옆으로 주어 들이는 힘을 또 한 번 줄였다. 사실 거중기의 구조를 지그시 보고 있으면 여러 사람이 수많은 팔로 직접 벽돌을 들어 올리고 있는 장면을 상상하게 된다. 움직도르래의 원리가 바로 그런 것이기 때문이다. 마치 무거운 시장바구니를 엄마와 내가 양 옆에서 들어올리면 혼자 들어 올리는 것보다 나은 이치 말이다.
움직도르래 하나를 이용해서 들어 올리면 하중의 1/2에 해당하는 만큼의 힘을 들여서 물체를 들어 올릴 수 있다는 것은 그저 단순한 사실처럼 보인다. 하지만 움직도르래 한 끝이 벽에 고정되었다는 사실을 눈여겨본다면 벽과 내가 짐을 같이 들어 올리는 것 같은 원리임을 알 수 있다. 또한 도르래의 굴러가는 성질은 끊임없이 벽과 내가 들여야 함을 공평하게 해 주는 역할을 한다는 것을 생각하면 도르래의 원리는 참 재미있다.
줄어든 힘만큼 이동 거리가 늘어난다는 것은 벽이 움직이지 않고 가만히 있는 수동적인 손(?)이기 때문이다. 다산의 거중기는 밧줄의 한 쪽 끝을 벽에 고정시키는 대신 사람의 힘을 양쪽 모두에서 작용하게 했다. 사람-거중기-사람이 벽돌 하나를 들어 올리니 한 번에 들이는 힘과 밧줄의 이동 거리가 수월하게 모든 사람들에게 분산될 수 있었던 것이다.
거중기를 이용했다 하더라도 벽돌들을 들어 올리는 데 드는 에너지의 총량이 줄었을 리는 없다. 요컨대 거중기를 써도 사람들이 배고픈 횟수는 똑같았을 거라는 말이다. 거중기가 일의 효율성을 높였다 하지만 백성들의 노고를 보살펴야 하는 임금의 몫은 줄지 않았다. 실제로 문헌 곳곳에서 정조가 노역에 동원된 백성들을 걱정하고 여러 가지 배려를 했다는 기록이 보인다.
아담한 궁내를 천천히 산책하듯 걸으며 둘러보고 나왔다. 햇볕도 따스하고 행궁 바깥 곳곳에는 넓게 잔디밭이 있어 소풍을 와도 멋질 것 같은 날이고 장소다.
해가 짧아 많이는 보지 못할 것 같아 서둘러 서장대로 향했다. 서장대는 수원성에서 가장 높은 곳으로 이곳에서 군사 지휘를 했다고 한다. 과연 수원성의 전반적인 모습이 한눈에 들어온다. 지금은 현대식 건물들로 빽빽하게 들어섰지만, 화성의 성곽이 수원 시내를 구불구불 가로질러 따뜻하게 감싸고 있다.
“유네스코 나름대로 지정한 세계문화유산인데, 강아지와 산책을 나온 사람도 있고 조깅하러 온 사람도 있어. 마치 잘 가꾸어 놓은 공원 같은 느낌이 드네. 주로 수원시민들이 많이 오는가 봐.”
J의 말에 주위를 둘러보니 과연 그렇다. 소중한 우리의 문화유산이면서도 현대인들과 공존하고 있는 모습이 좋아 보인다. 과학문화유산이라고 하면 대표적으로 알려진 것이 장영실과 세종대왕의 자격루, 측우기 같은 것들이지만 수원화성처럼 지역주민과 넓은 범위에서 공존하는 유산에서부터 옛사람들의 지혜를 찾아보는 것도 좋은 것 같다. 수원 화성에 관한 자료를 보면 돌을 쌓은 방식이라든지 지붕의 모양에서 옛사람들의 과학적 사고와 실용미를 많이 찾아 볼 수 있다고 한다.
벌써 해가 지고 있다. 일찍 도착하지 못한 것도 짧은 해도 모두 원망스럽다. 등 뒤에 놓고 가는 화성 곳곳에는 아직 숨겨져 있는 많은 이야기들이 있을 것만 같다. 이미 드라마 ‘대장금’과 사극 영화 ‘왕의 남자’ 촬영지로 알려지면서 이런 자랑스러운 문화유산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고 하니, 그 계기가 무엇이든 기뻐할 만한 일이다.
“하지만 과학 공부하는 사람의 욕심으로는 그런 영상미를 제공한 측면보다도, 건축사나 과학사 분야 같은 쪽으로도 알려졌으면 싶어. 내가 여기 오기 전에 도서관에 가서 한국과학사 서적이 있는 곳에서 수원화성의 자료를 찾아봤는데, 놀랄 만큼 자료가 빈약해 보였어. 몇 권 되지 않는 한국과학사 책에서 수원화성을 찾기란 의외로 어렵더라고. 한국과학사 분야를 연구하시는 훌륭한 분들이 있는 것도 분명 사실이지만 양적인 측면으로 봤을 때 아쉬운 부분이 있더라.”
물론 수원화성에 대한 여러 저서를 쓰신 김동욱 님의 <실학 정신으로 세운 조선의 신도시, 수원화성>과 같은 자료를 열람할 수는 있다. 조선일보사에서 낸 가이드북 <수원의 화성(華城)>과 같은 친절하고 알찬 가이드북도 있기는 하다. 하지만 수원화성이 갖는 과학사적인 의미를 부각해서 설명하지는 못했다.
<수원의 화성>에서 수원화성에 관한 기록 자료들을 학문적으로 정리하고 조명한다면 건축기술사나 한국과학사에서 당연히 취급될 만한 충분한 가치가 있으나 우리나라에선 이 분야가 미개척 단계라는 지적을 할 뿐이다. 요즘은 2004년도에 ‘한국 고전연구 심포지엄’에서 <화성성역의궤>가 여러 가지 분야의 주제로 나누어 다루어지는 등 화성이 관심의 대상이 되고 있다는 반가운 소식이 들리고 있어 과학사 분야에서도 좋은 연구 결과가 나왔으면 하는 바람이다.
출구로 나오면서 혹시나 하는 마음에 안내원에게 수원화성 축조 방식이나 건축기록 문헌, 복원 자료 등을 볼 수 있는 박물관은 없냐고 물어봤다. 아직 없다는 말에 힘이 빠진다.
“하지만 곧 생길 겁니다. 이제 막 착공됐어요. 2008년 3월에 개관 예정에 있습니다. 국비, 시비, 도비가 함께 투자된 꽤 규모 있는 박물관이에요.” 뒤이어 이어진 안내원의 설명에 아쉬운 대로 마음을 달래 본다. 그래도 우려와 욕심이 한꺼번에 드는 것은 어쩔 수 없다. 그냥 세계문화유산에 형식적으로 딸린 죽은 박물관이 되는 건 아닐까 하는 최악의 경우에 대한 우려와, 우리 조상들에게 존재했던 과학적, 기술적 아이디어를 조명하여 한국 박물관의 자랑이자 과학사 박물관의 모범으로 삼는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욕심 말이다.
가족, 친구, 연인과 산책로처럼 걸을 수 있는 세계문화유산이며 파내도 파내도 나오는 풍부한 아이디어들이 숨쉬는 수원화성에 세워진 박물관. 어른도 아이도 다시 찾고 싶은 작아도 알차게 꾸며진 박물관을 기대한다.
/꿈꾸는 과학 김지혜 buzzi85@hot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