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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이 내린 가장 큰 선물은 ‘망각’

하얀제비 2006. 1. 12. 09:01

신이 내린 가장 큰 선물은 ‘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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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대기업에 다니는 친구가 블로그에 쓴 글을 읽었다. 연말에 직원들의 한 해 업무에 대한 평가가 있었던 모양이었다. 모든 직원은 ‘기대를 초과달성했다’ ‘기대에 부응했다’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는 등 세 기준으로 평가를 받았다고 한다. 그리고 한 부서 사람들을 다시 ‘우수’ ‘보통’ ‘미달’ 등 세 그룹으로 나눴다고 한다. 그러니까 기대를 초과달성했다는 평가를 받더라도 그 부서 안에 일 잘하는 사람이 많으면 꼴찌 그룹에 속할 수도 있는 것이다.

믿을 수 없지만 능력있고 똑똑하고 성실한 내 친구는 이 꼴찌 그룹에 속했다. 친구는 너무 큰 충격을 받아 통보를 들은 후에 울음이 터질 것 같았다고 했다. 이런 가혹한 성적표를 받고 사는 삶을 보고 나도 너무 놀랐다. ‘우수한 인력이 몰린 부서에서 상대평가를 받았으니 운이 나쁜 게지’ ‘미국 사람들이야 이런 냉정한 평가에 익숙하니까 괜찮겠지’라고 생각했지만, 설사 그렇다 해도 얼마나 상처를 받았을까, 마음이 아팠다.

그런 기준에 맞춰 지난해 내가 한 일을 곰곰 생각해보니 속이 상한다. 일도 일이지만, 사실 2005년은 특히 상반기에 이런 저런 일로 마음고생을 심하게 했다. 그때 언젠가 한 선배가 불쑥 전화해서 “너 요즘 굉장히 힘들지? 네가 기사 쓰는 양을 보면 내가 다 안다”고 했을 때, 눈물이 후두둑 떨어질 뻔했던 것을 가까스로 참았다. 그 선배는 “운동할 때 근육이 막 아프지? 그럼 그때 그 근육이 강해지고 있다는 뜻이야. 조금만 더 참고 견뎌”라고 했다.

그리하여 나는 진짜 단 한 장의 원고도 더 이상 쓸 힘이 없어서 ‘누가 지시해도 듣지 않겠다’고 굳게 결심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선배가 부탁한 일을 했다. 일 시키려고 그냥 해본 빈말이라 해도, 그 말은 그 즈음 내가 들은 가장 따뜻한 말이었다. 똑같은 일도 그런 말을 듣고 하니까 덜 힘들었다.

지난해는 일 그 자체보다는 사람에게 좀 시달렸는데, 그 과정을 통해 얻은 깨달음은 ‘폭넓은 지식을 얻는 것보다 너그러운 인간이 되는 것이 백 배는 더 어렵다’는 것이다. 어떤 분야에 대해 알고 싶으면 열심히 읽고 토론하면 어느 정도 수준으로 올라갈 수 있다. 그리고 일정 수준에 도달하면 그 다음부터는 훨씬 더 쉽고 빠르게 이해수준을 높일 수 있다. 하지만 너그럽고 품성좋은 인간이 된다는 것은 그렇게 쉽지가 않다. 매순간이 도전이다.

나이가 들면 성격도 자연스럽게 몸매만큼이나 둥글둥글해지는 줄 알았다. 세상일에 대해서도 아랫배에 붙는 뱃살만큼의 ‘완충(緩衝)’이 생겨 그럭저럭 넘길 수 있을 줄 알았다. 아,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날로 속은 좁아지고 사소한 일에 강렬하게 열받기 시작했으며 건망증이 심화되는 가운데도 서운한 일은 절대 잊지 못했다. 이렇게 신경이 날카로워지니까 일도 엉망이 되고 주변 사람에게도 모질게 굴었다.

그래서 연말엔 속죄하는 마음으로 여기저기서 날아온 기부금 청구용지를 찾아서 적은 돈이라도 조금씩 보냈다.(이런 일도 연말에 몰아서 벼락치기로 하다니!) 어쨌거나 고달팠던 2005년은 이렇게 갔다. 신이 인간에게 준 가장 큰 선물은 ‘용서’와 ‘망각’이라고 하지 않던가. 연말에 뜨겁게 놀아주면 나쁜 기억이 모두 녹아 새해 아침에 일어났을 때는 마음의 키가 한 뼘쯤 자라 있지 않을까.

한 해 동안 ‘워싱턴라이프’를 읽어주신 많은 분께 감사드린다. 새해 복 많이 받으시기를.

강인선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