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의 노래

[복거일의 SF소설 - 역사 속의 나그네](

하얀제비 2006. 4. 3. 13:14
[복거일의 SF소설 - 역사 속의 나그네](200회)

역내다리로 가는 길을 따라 한 줄로 걸어가는 수색대를 그는 아쉬움과 기대가 섞인 마음으로 바라보았다.
‘언제 내가 기병들로 이루어진 수색대를 내보낼 수 있을까?’

이런 경우에는 물론 기병대를 내보내는 것이 좋았다. 고대와 중세의 싸움터에서 기병대가 지녔던 중요성은 현대 사람들은 상상하기 쉽지 않을 만큼 컸다. 기병대가 없는 군대가 강한 기병대를 가진 군대를 막아내는 일은 아주 어려웠다. 기병대의 돌격이 상대에게 주는 충격은 그만큼 컸다. 기병대의 중요한 기능들 가운데 덜 알려진 것은 정찰과 수색이었다. 기동력을 지닌 기병대는 지휘관의 눈 노릇을 했고 기병대를 갖지 못한 지휘관은 정보를 제대로 얻을 수 없었다.

‘이곳에서 말을 구하려면... 내일은 먼저 일흥역에 나가봐야겠다. 내가 미쳐 그 생각을 못했구나. 순서가 뒤바뀐지도 모르겠다. 먼저 역에 있는 말들을 얻고 그 다음에 창고를 수색하는 것이... 그리 했으면, 곡식을 나르는 데도 도움이 되었을 텐데.’
그는 속으로 가볍게 혀를 찼다.

일흥역(日興驛)은 무한쳔 서쪽에 있었는데, 이곳에서 시오리쯤 되었다. 어젯밤 지도에서 찾아보니, 뒤에 장항선의 오가역(吾可驛)이 자리잡을 곳이었다. 일흥역은 튱청도 서북부를 동서로 지르는 시흥도(時興道)에 속해서 신챵현의 챵덕역(昌德驛)과 덕산현의 급쳔역(汲泉驛)을 이어주었다. 따라서 일흥역을 점령하거나 무력화시키는 것은 내보 지방의 홍쥬진이나 해미 병영과 튱쥬의 감영과 한셩의 중앙 정부 사이에 정보가 흐르는 통로를 끊는다는 점에서 꽤 큰 전술적 뜻을 지닌 일이기도 했다.

다시 현청 안으로 들어오기 전에, 그는 모인 사람들 속에서 박초동을 찾았다.
“박대쟝.”

“녜, 원슈님.”
박이 급히 다가왔다.

“김항?C(텨ㄹ) 총독이 밧개 나간 동안, 션임 단대쟝이신 박대쟝께셔 뎨일듕대랄 잇그쇼셔. 사람달히 나모랄 버히는 일이 이대 다외개 하쇼셔.”

“녜, 원슈님. 이대 알겠압나니이다.”
박이 좀 불안한 낯빛을 지었다.

‘우동이가 빨리 나아야 할 텐데.’
박초동은 착하고 믿을 만했지만, 마음이 너무 고왔다. 그래서 사람들을 지휘하는 데는 뚝심이 있는 박우동이 형보다 훨씬 나았다.

걸음을 옮기면서, 그는 옆에 선 쟝츈달을 돌아다보았다.
“쟝대쟝께셔 맛다신 일은 엇디 나아가나니잇가?”

좀 열쩍은 웃음을 지으면서, 쟝이 턱을 문질렀다.
“생각하얏던 것보다난 졈 어려워셔... 아직...”

눈치를 보니, 쟝이 얘기한 것은 투석기를 만드는 일이었다. 그는 발판을 만드는 일에 대해 물었던 것이었다.

“투셕긔를 맹가난 대난 형구들흘 쓰는 것이 엇더하겠나니잇가?”

그의 말뜻을 제대로 알아듣지 못한 듯, 쟝이 그의 얼굴을 멀거니 쳐다보았다.

“사람달희 죄랄 다살 때 쓰는 형구들흘 투셕긔를 맹가난 대 쓰자 하난 녜아기니이다. 어제 나죄 형틀을 보니, 투셕긔를 맹갈기 됴히 삼기얏더니이다.”

“아, 녜. 형틀로 투셕긔를 맹간다난 말쌈이시니잇가?”

“녜. 나이 생각하야보니, 앞으로난 사람달할 형구로 도딜게 다사난 일안 없을 닷하나이다,” 그는 단호하게 말했다. “셜령 큰 죄랄 지은 사람이라도 이제는 형구로 모딜게 다사난 일안 없게 하겠나이다.”

어저께 현청을 둘러다볼 때, 그는 형구들을 보고 끔찍한 생각이 들었다. 창고에 쓸 만한 무기들은 드물었어도, 매에서 나무칼에 이르기까지, 형구들은 가지도 많았고 잘 간수되어 있었다. 형구들은 모두 끔찍했지만, 압슬(壓膝)에 쓰이는 것들은 특히 끔찍했다. 얘기를 들어보니, 압슬을 할 때는 고문을 받는 사람의 무릎 아래에 사금파리들을 깔아놓고 무릎 위에 무거운 돌을 얹었다. 그는 그 자리에서 형구들을 모두 없애기로 마음먹었다. 앞으로 그가 어떤 법 체계를 세우든, 고문이나 체벌이 설 자리는 없을 터였다.

“아, 녜.”
쟝은 자신 없는 어조로 대꾸하고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 일안 문셔 참모부 김대쟝과 샹의하쇼셔."
그는 김교듕을 찾았다. “김대쟝, 형구들흘 모도 쟝대쟝께 넘기쇼셔. 형구들로 연장달할 맹갈 새니이다."

“녜, 원슈 나아리,.”
김이 좀 얼떨떨한 얼굴로 대꾸했다.

그는 속으로 야릇한 웃음을 지었다. 형방의 셔원이었던 김에게 형구들을 없앤다는 얘기는 작지 않은 충격을 주었을 터였다. 김에게 피의자들을 고문하는 것은 당연한 절차였고 갖가지 형구들은 법 집행에 필수적인 도구였다. 관의 위엄을 보인다고 증인들까지도 먼저 형틀에 매어놓고 매를 때린 다음 증언을 듣는 사회였다. 그러나 사람들을 고문하거나 벌을 주는 데 쓰여온 형구들을 다른 일에 쓰는 것은 그로선 신나는 일이었다.

그는 다시 쟝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그리하고 앗가 맹간 발판알 보니, 이대 다외얏더니이다. 그대로 맹갈아쇼셔.”

“녜, 원슈님. 알겠압나니이다.”
쟝의 얼굴이 비로소 밝아졌다.

현청 안으로 들어서자, 사람들은 제각기 일을 찾아 흩어졌다.

“김대쟝,”
길청으로 향하면서, 그는 김교듕에게 물었다.
“쌀어음을 맹가시난 일안 엇디 나아가나니잇가?”

“관과 자문알 맹가노라, 죠곰 늦었압나니이다. 이제 한 셜흔 쟝 맹갈았압나니이다.”
관(關)은 다른 관청에 보내는 공문이었고 자문(尺文)은 영수증이었다.

“일이 너모 많나이다?”

“녜, 죠곰...”

“곧 문셔 참모부의 사람알 늘리겠나이다. 슈고로오시더라도, 며츨만 더...”

“녜, 원슈 나아리.”

“그러하면 맹간 것이 엇더한가 보사이다.”

그가 길청 앞마당에 이르자, 마루 위에 앉았던 사람들이 부산하게 일어섰다. 리산응이 급히 앞으로 나와서 토방으로 내려섰다.

“모도 하던 일들흘 하라 하쇼셔.”
리에게 얘기하고서, 그는 신을 벗었다.

“모도 하던 일들흘 하라 하시내.”
이런 일에 익숙지 못한 리가 좀 어색한 어조로 사람들에게 말했다.

그가 마루로 올라서자, 김교듕이 한쪽에 있는 문셔 참모부를 가리켰다.
“원슈 나아리, 뎌긔로...”

“녜.”
그는 그리로 가서 서안 앞에 앉았다.

“여긔 이시압나니이다.”
김이 박윤도의 서안에서 종이 한 장을 집어 그의 앞에 놓았다.

가슴속에 기대가 묵직하게 자리잡는 것을 느끼면서, 그는 그것을 들여다보았다.

쌀어음 (米於音)
한 문 (壹文)

뎨 호

하나. 이 어음은 호셔챵의군에셔 펴아낸 것으로 쌀 한 말(米壹斗)의
값알 디니도다.

둘. 이 어음을 쌀로 밧고고져 하난 사람안 이 어음을 호셔챵의군
티부 참모부쟝애게 내면 다외도다.

세. 호셔챵의군에게 진 빚을 갚알 때난, 엇던 졀제도 받디 아니하고
이 어음을 쓸 수 이시도다.

기묘 삼월 초파일
호셔챵의군 원슈 리언오
티부 챰모부쟝 리산응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아침에 지시한 대로 만들어진 것이었다.
“이대 다외얏나이다.”

긴장해서 그를 살피던 김과 박의 얼굴이 밝아졌다.

‘쌀어음’과 같은 것이 있어야 되겠다는 것은 봉록을 정한 군령을 낼 때부터 분명했다. 병사들의 봉록을 모두 쌀로 주는 일은 불편할 뿐 아니라 위험하기도 했다. 한번 쌀을 받으면, 병사들은 그 쌀을 보관하는 일에 신경을 쓰게 될 터였다. 더 걱정스러운 것은 병사들이 그 쌀을 한시라도 빨리 가족에게 갖다주고 싶어하리라는 점이었다. 자칫하면, 첫 봉록을 내주는 날이 챵의군이 흩어지는 날이 될 수도 있었다. 쌀어음은 그런 사정을 적잖이 누그러뜨릴 터였다.

그는 대견한 눈길로 쌀어음을 살폈다.
‘돈으로 쓰는 데는 좀 크지.’

쌀어음은 폭이 한 자고 길이가 한 자 반이었다. 인쇄를 해야만, 크기를 줄일 수 있을 터였다.

‘너무 얇고.’
그는 손가락으로 문질러보았다.
‘몇 번 쓰지 않아서, 해지겠다. 나중에 인쇄할 대, 두꺼운 종이를 따로 만들어 써야겠다. 그럴 수만 있다면, 위조가 어렵게 만들면서.’

쌀어음은 이름에서나 성격에서나 어음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그것에 큰 기대를 걸고 있었다. 그것을 차츰 챵의군의 통치 지역에서 통용되는 화폐로 삼아서, 언젠가는 근대적 화폐 제도를 도입할 생각이었다. 가슴속에 묵직하게 자리잡은 야심에서 전해오는 따스함을 느끼고, 그는 혼자 싱긋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