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얀제비 2009. 7. 9. 12:25



전쟁이란 체면이나 양심, 도덕률.
그런 것과는 거리가 먼 곳에 현실로 존재했다.

유치원에 다녔어야 할 나이의 어린이가
깡통을 들고 거리에 떠돌며
낯선 얼굴들에게 손바닥을 벌려야 했었다.




나무뿌리라도 먹어야 겨우 버틸 수 있었다.
그리고, 잡초보다 모질게 살아남아야 했다.

아이를 업은 소녀의 손에 쥐어진 나무뿌리는
이 가족의 땔감일까? 아니면, 한 끼 식사일까




추위와 배고픔에 지친 어린 형제가
골목에서 해바라기를 하고 있다.




전쟁통에 용케도 살아남은 이 소년 소녀들은
시민혁명과 5.16혁명으로 얻은 경제기적의 한복판을
질풍노도속으로 달려 왔고
세계속에 의지의 한국인으로 살아 남았다.

만약에 5.16혁명이 없었으면?

오늘의 우리는 없었을 것이다.




부모님은 피난통에 돌아가시고,
살던 집은 폭격으로 다 부서져 폐허가 된 터에
어린 소년이 버려진 채 눈물을 훔치고 있다.

왜 저들은 저런 고통을 받아야 했을까?

군인들이 쉬는 휴일을 맞아 북한군이 기습적으로 남침했기 때문이다.

나 자신도 저 속의 한 인물이라 생각하니 눈물이 앞을 가린다.

배고파서 남대문시장 한모퉁이에서 꿀꿀이죽을 먹었던 생각에 ....

※ 꿀꿀이죽 : 그 당시 미군들이 먹다버린 음식물 찌꺼기를 다시

                   가마솥에 끓여서 죽을 만들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

고난의 1950년대를 몸으로 때우며 살아온
우리 민족의 눈물어린 단면이다.




찬 이슬을 피할 수 있는 곳이라면 헛간이라도 좋았다.

행색은 초라해도 카메라를 신기한듯 바라보는
초롱초롱한 눈매의 자매들은
지금쯤 어떤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을까?




개털모자에 항공모함같은 헝겊 군화, 곳곳을 기운 복장이
1950년대 유년시절을 보냈던 우리 아버지 세대의 자화상이었다.




추위만 이길 수 있다면 누더기가 다 된 솜바지라도 행복했다.




판자로 얼기설기 엮어 지은
2층 건물 곳곳에 피난민이 바글대고 있다.

고함 한번 치면 풀썩 주저앉을 듯 위태로운 건물 모습이
위기에 처한 우리 조국의 모습을 상징하는 듯하다.




엄동설한 추위를 피하기 위한 땔감도 넉넉지 못했던 시대
두 소년이 끌고 가는 수레에는
한 식구의 온기를 담보하는 행복이 실려있는 듯하다.




태평양을 건너온 미군복을 얻어 입는 것이
가장 큰 행복이었던 시절이 있었다.

간혹 마음씨 좋은 미군 아저씨를 만나면
미국으로 입양되는 행운을 얻기도 했었다.




연을 들고 포즈를 취한 소년들.
전쟁의 상흔을 잠시 잊은 듯하다.




추위와 배고픔에 지친 한 아이가 탈진했는지
기둥에 머리를 기대고 있다.

마치 요즘 북한의 꽃제비를 연상케 하는 모습이다.




미군 병사가 한 소년을 목욕시키고 있다.
소년은 카메라를 들이대자
잔뜩 겁을 먹었는지 얼굴 표정이 굳어 있다.




노인이 문 긴 담뱃대를 바라보는 소년과,
소년의 손에 쥔 깡통 속을 바라보는 노인.

전쟁은 노인의 빈 담뱃대와 소년의 빈 깡통 속에 있었다.




봇짐을 등에 진 할아버지와 망태기를 손에 든 손녀.




피난을 가는 일가족의 전형적인 모습.

이렇게 지게에 가재도구를 싣고
수백리 길을 걸어서 피난을 떠나야 했었다.




젊은이들이 가질 수 있는 직업이래야
날품팔이가 고작이었던 시절.
한 지게꾼이 피로에 지친 모습으로 길가에서 잠들어 있다.





황량한 벌판을 배경으로 포즈를 취한 어린이.
담요 한 장으로 매서운 추위를 견디낼 수 있었을까?




거제도 포로수용소에서 똥통을 운반하고 있는 공산군 포로들..




수용소에서 공산군 포로들이 한가롭게 목욕을 하고 있다.
피가 튀고 뼈가 조각 나는 포연 자욱한 전쟁터
이들에게는 그저 스쳐간 한낮 일장춘몽이었을까?




삶과 죽음이 무시로 교차하는 전쟁에서
운이 좋은 사람들은 살아남았고,
그렇지 못한 사람들은 한 점 흙으로 사라져갔다.



물따라, 바람따라 그렇게

우리들의 기억속에서

하나씩.. 둘씩..

모두 다, 잊혀져 갔고,

모두 다, 잊고만 싶었던 세월들..


그러나, 결코..

하나도, 잊을 수도 없고,

하나도, 잊어서는 아니 될

우리들의 아픈 상처이자, 슬픈 자화상이었다.

 

 

그러나 요즘 젊은이들은

 

우리의 현재 모습이 자연스레 잘 살게 되었는 줄 안다.

 

5.16 당시 왜 혁명이 일어났는지조차 모른다.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그 당시의 정치판은 실로 가관이었다.

 

정치깡패가 득시글대고

 

골목마다 상이군경의 갈고리와 거지들이 들끓고

 

정치판에서는 서로 저 잘났다고 국회에서는

 

싸움질이나 해 대고

 

대통령은 인의 장막에 가려 아무것도 모른 채

 

멸망의 길로 한 걸음 한 걸음 다가가고 있었던 시대였다.

 

위 사진에서 보듯 국민들은 굶어죽겠다고 아우성치는데도....

 

그 당시 정치판은 나만 잘 먹고 잘 살면 그만이지

 

국민들의 배고픔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어떻게 하면 미국의 원조를 더 얻어오느냐가 관심이었다.

 

이북의 국민소득이 우리보다 많은 시절이었으니까.

 

이를 보다못한 군인들이 들고 일어나 지금의

 

부를 창출하게 된 것이다.

 

돈이 없으니 서독에 간호원과 광부를 보내

 

돈을 벌게 하고, 월남전에 참가하여 돈을 축적하여

 

국가의 기간산업을 일으킨 것이다.

 

유명한 일화로 경부고속도로 건설 발표가 나자

 

야당에서는 환경 파괴를 이유로 엄청나게 반대했었다.

 

그러나 국가관이 뚜렷했던 정부는 그대로 밀어붙여

 

완공한 것이다.

 

경부고속도로가 완공되자 그 당시 야당 최고 지도자가

 

제일 먼저 달려보는 넌센스까지 있었던 시절이었다.

 

그 야당의 끈질긴 주장으로 호남고속도로가

 

만들어졌다. 경부고속도로를 그처럼 반대하던

 

그들이 왜 호남고속도로를 원했을까?

 

그런 그들이 이제는 지금의 부를 이루게 한 지도자를

 

공산당이라 부르고 있다. 넌센스도 도를 넘지 않았을까?

 

공산당의 가장 큰 약점은 부정부패에 있다.

 

중국, 러시아 등 공산국가들에서 벌어지는

 

사태들을 ....

 

이제 젊은이들이 스스로 우리의 부를 지킬 때가 되었다.

 

거짓으로 가득한 사회주의의 실상을 스스로 깨닫고

 

양지로 나와야 할 때다.

 

모두 이제 나라를 걱정하자.

 

길거리에서 민폐를 끼치며 시위하는 떼거지 문화부터

 

없애야겠다.